케부리아, 런던을 정치적 무대로 연 이유
첫 남성복 데뷔가 던진 메시지
첫 남성복 데뷔가 던진 메시지
런던 패션위크 스프링·서머 2027 시즌의 문을 연 것은 초대형 브랜드의 화려한 복귀도, 셀러브리티의 프런트로 등장도 아니었다. 조지아 출신 디자이너 브랜드 케부리아(KEBURIA)가 처음으로 선보인 남성복 컬렉션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오프닝 룩은 등에 기타를 멘 모델이 붉은 글씨로 "푸틴이 불타길 바란다"는 문구를 새긴 채 런웨이를 걸어 나오는 장면이었다. 뉴욕 패션위크가 에너지와 혼란으로 뒤섞인 채 막을 내린 직후였다는 점에서, 런던이 다시 한번 "불규칙한 창의성과 예상 밖의 순간을 무대로 만드는 도시"라는 오랜 별명을 증명한 셈이다. 여성복 브랜드로만 알려졌던 케부리아가 왜 하필 남성복 데뷔를,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택했는지가 이번 시즌 런던의 첫 화제로 떠올랐고, 이는 요즘 런웨이 오프닝이 단순한 옷 소개가 아니라 하나의 발언 창구로 쓰이고 있다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무엇이 달라졌나
케부리아에게 이번 쇼는 단순한 신작 발표가 아니라 브랜드 역사상 첫 남성복 컬렉션이라는 점에서 무게가 다르다. 오프닝 룩의 기타와 붉은 문구는 시선을 끄는 장치였지만, 뒤이어 나온 옷들은 오히려 정교한 재봉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각진 어깨선과 건축적인 칼라 같은 정밀한 테일러링에, 지나치게 큰 포켓과 거의 없다시피 한 기장의 반바지 같은 과장된 실루엣을 겹쳐 놓아 절제와 과잉을 한 무대에서 동시에 보여줬다. 영감의 출처도 구체적이다. 영국 시골 풍경과 승마 복식, 웨스턴 디테일을 뼈대로 삼아 워시드 캔버스와 메탈릭 트위드, 커스텀 자카드 원단을 섞고 스커트부터 가방까지 전방위로 프린지 장식을 둘렀다. 브랜드의 시그니처였던 노티컬(항해) 모티프도 이번 시즌엔 더 화려하게 장식되어 돌아왔다. 즉 파격적인 오프닝 한 장면 뒤에는, 여성복에서 다져온 브랜드의 기존 정체성을 남성복이라는 낯선 언어로 재번역하는 훨씬 정교한 작업이 깔려 있었다는 뜻이다. 소재와 실루엣을 겹겹이 쌓으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 단순한 화제성 쇼와 이 컬렉션을 구분 짓는 지점이다.
왜 지금인가
이번 시즌 런던 패션위크는 유독 '귀환'이 많은 스케줄이다. 매퀸이 션 맥거크 체제로 다시 런던에서 쇼를 열고, 멀버리는 크리스토퍼 케인을 새 수장으로 맞아 복귀했으며, KNWLS도 지난 시즌 밀란에서의 짧은 외도를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여기에 H&M이 첫날부터 셀러브리티 화력을 앞세워 존재감을 예고했다. 즉 이번 주는 굵직한 이름들이 한꺼번에 관심을 끌어가는, 유난히 붐비는 일정이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케부리아처럼 상대적으로 젊은 브랜드가 주목받으려면 조용히 옷만 보여주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정치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운 오프닝은 화제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남성복이라는 새 카테고리를 처음 선보이는 자리에서 브랜드가 무엇을 두려워하지 않는지를 분명히 하는 선언이기도 했다. 대형 브랜드들의 복귀 러시 속에서 신진·독립 브랜드가 목소리를 키우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 오프닝은 런던 특유의 힘겨루기 구도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결국 큰 이름들이 안정적인 복귀를 예고한 주간일수록, 그 사이에서 존재감을 남기려는 브랜드는 더 과감한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다는 계산도 읽힌다.
다음에 볼 것
케부리아의 남성복이 이번 시즌 한정 시도로 끝날지, 정규 라인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이번 쇼가 워낙 강한 인상을 남긴 만큼, 브랜드가 다음 시즌에도 남성복을 지속할지, 이번에 쓰인 승마·웨스턴 모티프를 얼마나 더 발전시킬지 지켜볼 지점이다. 아울러 이번 주 남은 일정도 함께 살펴볼 만하다. 션 맥거크의 매퀸, 크리스토퍼 케인의 멀버리, 밀란에서 돌아온 KNWLS까지, 복귀를 내세운 브랜드들이 케부리아만큼 파격적인 승부수를 던질지, 아니면 안정적인 복귀 신고식에 무게를 둘지가 이번 런던 패션위크 전체의 온도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프린지와 자카드, 워시드 캔버스 같은 이번 시즌 소재 조합이 다른 런던 브랜드들의 컬렉션에서도 반복되는지 살펴보면, 이번 시즌 런던이 어떤 무드로 수렴하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메시지를 내건 오프닝이 이후 다른 브랜드에서도 반복되는 패턴으로 자리 잡을지, 아니면 케부리아만의 일회성 제스처로 남을지도 시즌 내내 눈여겨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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